지속 가능성 시대의 일원으로서 기본자세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은 이를 전파하기 위해 진부해졌다. 닳고 닳아 잔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문장의 속뜻은 우리는 누군가의 조력을 받아 온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발생하는 부채를 상기하고 공동체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부한 표현이란 어떻게 진부해지는가. 진부한 표현은 진부해질 수밖에 없어서 진부해졌다. 쉽게 망각되는 삶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거듭 발화되는 과정에서 진부한 표현은 탄생한다. 본디 즉물적으로 사고하는 인류는 목도하지 못하는 것은 부정하려는 습성이 있다. 넘어진 자신에게 누군가가 내민 손을 받들거나 도로에서 신호를 양보받을 때나 나(개인)는 우리(다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한다. 그러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대개 그러하듯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삶에는 더욱 중요한 의밋값을 지니는 법이다. 김금희의 산문 『나의 폴라 일지』는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상(想)을 실체화하여 눈앞에 내민다.

작가가 남극을 방문하여 취재한 내용을 기록한 『나의 폴라 일지』는 여행 에세이로 위장한 인류학 보고서다. 물론 여행기에서 기대하는 이국의 풍경과 정서와 영감이 있다. 이를테면, ‘남극’이라는 장소에서 기대될 법한 펭귄 마을과 유빙과 광활한 절경과 이를 앞에 두고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138p)”을 자각하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나 더욱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그곳의 풍경에 섞여 자신의 역할을 해내려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그들과의 역학이 자아내는 공동체로서의 감각이다.

때로 가치에 명징하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제약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공동체라는 가치를 직시하는 데 있어 남극이라는 장소가 갖는 이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제한 구역이라는 점, 둘째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반)강제로 금지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살면서 발조차 딛지 못할 극지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방치하기란 쉽다. 그러나 남극 내 대기의 강을 관찰하고 추적함으로써 전 세계의 기후 동태를 파악하고 예측하고 대비하는 남극 연구원의 노력이 우리 일상과 분리되어있다고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작가가 남극에 체류하는 동안 숱하게 목격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떻게도 갚을 수 없는 익명의 빚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는 부채감 말이다.

공동체의 감각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제한 구역의 특성이 거시적으로 작용한다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제약은 보다 미시적이다. 각기 다른 삶의 형태를 띠는 개인에게는 개인의 목표가 있다. 남극을 방문한 연구대원들도 마땅히 그러하다. 누군가는 대기의 관점에서 식생을 연구하며 24시간을 꼬박 깨어있고, 누군가는 셀 수 없이 무수한 종 수를 자랑하는 옆새우에 몰두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작업이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든 2인 1조로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그들은 모든 작업을 조력자와 함께 수행한다. 하물며 과학적 지식이 빈약한 작가마저 연구와 실험에 동참한다.

공동체 의식을 체득하는 효율적인 훈련은 다른 사람의 신을 신어보는 것일 텐데, 사실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힘들게 길을 들인 나의 신, 다시 말해 익숙한 인지와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이유를 스스로 설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행동은 말보다 효율적이다. 작가는 기지의 규율과 구성원의 당위 아래 타인의 사명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작동 방식을 몸소 깨닫는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지구의 미래는 온통 그들이 관심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존재에 의해 운용된다는 착각에 빠졌다. 대기과학자와 이야기하면 산소와 탄소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고 해양생물학자와 이야기하면 지구의 진정한 주재자는 원생동물과 동식물 플랑크톤 같았다(91-92p)”고 작가는 남극 체류 초반에 증언한다. 이후 대원들의 역할극에 참여하는 작가의 행보는 ‘착각’이라고 생각한 것을 타인과의 연대에 대한 ‘착상(着想)’으로 정정하는 작용으로 보인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동체에 방점이 찍힌 듯 보이지만, 이는 곧 자연과 지구에 대한 사려로 확장된다. 출남극을 앞둔 어느 날, 작가는 남극에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지점이 그 증명이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된다고 강제하지도 못하니 결국은 개개인의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 일상적 선택들이 일으킬 변화에 대한 예민한 자각들만이, 행성으로서의 지구와 한 종으로서의 인간과의 긴밀한 연결감만이 이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266-267p)”라고 정결한 땅과 미래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편, “미안함이 미안함”으로 끝나지 않도록 “여기 오기까지 내가 낸 탄소 발자국을 지울 만큼의 작업을 해내야지(267p)”라고 다짐하며 몸을 움직인다. 작가가 여행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환경에 대한 책임을 넌지시 제안하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글이 나아감에 따라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지구로 공동체의 개념은 확장되고, 귀국한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가꿈으로써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임무를 다해낸다.

그리하여 책을 덮고 나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남극에 가보고 싶다는 감상은 다소 순진하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포부는 외려 책을 읽지 않은 자의 것에 가깝다. 매 순간 나의 시선이 포착하지 못하는 곳에서 나의 존속에 기여하는 타인의 재생 행위와 공동체의 순환에 대한 감각, 그것은 작가가 남극에서 얻은 가장 진귀한 보물일 것이며 “극지가 주는 가장 투명한 마음(47-48p)”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사진 출처: 한겨레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