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의 맛, 그리고 얼굴

채소의 계절 저자, 재인

김은경기자 승인 2023.09.22 16:14 의견 0

“이번에 산 복숭아도 맛이 없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복숭아가 영 별로다.”

“다음번에는 복숭아 말고 다른 거 사자.”

“그래. 그래야겠다.”

이번 여름 몇 박스의 복숭아를 먹었다. 그런데 올해 비가 자주 와서 그런지 사 먹는 족족 맛이 없다. 달지도 않고, 시지도 않고, 향도 거의 없고, 퍼석한 식감만 남아 있지 정말 무(無)맛이다. 맛이 없는 복숭아는 사람의 눈길과 손길은 받지 못하고 날파리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받으며 하나둘 물러터져 간다. 비단 복숭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옥수수는 알이 듬성듬성 비어있고, 양파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요리에 쓰려고 껍질을 까면 속부터 문드러져 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채소와 과일 앞에서 속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이번 여름에는 유달리 많은 양의 비가 짧은 시간 동안 내리는 일이 많았다. 그로 인해 어떤 지역은 침수가 되기도 했고, 흙이 떠내려가고 산사태가 일어났다. 채 복구가 되기 전에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덮쳤다. 수천 명의 사람이 집을 잃고, 밭을 잃고, 사람을 잃었다. 이 모든 게 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한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끓고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많은 수증기가 증발하면서 대류를 촉발하고 기세가 더 강력하고 강렬해지면서 한 번에 비가 폭발적으로 내리는 것이다.

폭우가 내리고, 태풍 카눈이 이례적으로 한반도를 수직 관통하기는 했지만, 서울에 사는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뉴스를 보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 어렴풋이 ‘비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이 내리면, 흙이 휩쓸려 내려가겠구나. 어딘가는 물에 잠기겠구나. 농작물에 피해가 크겠구나.’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피부로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생활 반경 안에 크게 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집을 잃고, 누군가는 밭을 잃고, 누군가는 사람을 잃는, 누군가의 삶이 송두리째 변할 동안 나의 일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한바탕 비가 휩쓸고 지나가면, 고작 내가 느끼는 변화라고는 내가 달리기하는 하천이 출입 금지되어 며칠간 이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 복숭아가 맛이 없어진다는 것, 채소 값이 비싸진다는 것 정도다. 이외에 다른 변화는 없다. 이것도 딱히 내 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아니다. 마트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제 팔던 채소 중 오늘 살 수 없는 채소는 없었다. 이제 곧 수확만을 남겨놓고 있던 사과가 태풍에 떨어져 성한 게 하나도 없다던 TV 속 농부의 모습은 마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생협에 가면 텅 비어있거나 듬성듬성 채워진 매대에 ‘태풍으로 인해(혹은 폭우로 인해) 채소가 많이 없어요.’라는 문구가 붙어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삶이 이토록 달라지는 동안, 다른 한편에 있는 나의 일상은 이토록 평화롭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나를 먹여 살리는 농부가 밭을 잃어도, 나의 식탁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돈으로 교환한 채소와 과일에는 얼굴이 없다.

나는 이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달지 않은 복숭아를 먹으며, 복숭아가 담겨있던 상자에 적힌서양님씨의 얼굴을, 복숭아 뒤에 있는 숨겨진 그의 일상을 그려본다. 그에게 이번 여름은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까. 지난 폭풍은 그의 삶에 어떤 생채기를 남기고 지나갔을까. 내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이 복숭아 한 알은 그에게는 ‘폭풍을 견뎌낸’, ‘고맙게도 살아남아 준’ 귀중한 한 알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비가 없는 것은 태풍이 아닐지도 모른다. ‘복숭아가 맛이 없다’ 불평하던, 채소와 과일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속상해하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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