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

채소의 계절 저자, 재인

김은경기자 승인 2023.08.25 15:55 의견 0

스타벅스에 들어서면서 달이 바뀌었음을 알아차린다. 문 앞에 붙어있는 신메뉴가 달이 바뀔 때마다 함께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1년 전부터 매달 그래왔다. 누군가는 스타벅스의 부지런하고 성실함에 감탄하며 자신도 더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즐거워하겠지만, 나는 새로운 메뉴를 볼 때면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진다.

몇 주 전, <다음 소희>를 보고 불현듯 스타벅스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다음 소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소희라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게 되면 그건 소희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포토 : 다음소희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성화고를 졸업한 소희는 선생님이 어렵게 뚫었다는 한 대기업의 하청업체에 인턴으로 실습을 나가게 된다. 실습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턴에게 저임금을 주고 노동을 착취하는 일이다. 대기업이라는 말에 소희는 잔뜩 들떠서 첫 출근을 한다. 그런 소희 앞에는 본인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직원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쉴 새 없이 콜을 돌리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소희는 당황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한다. 담당하는 팀장님과 계약서를 쓰고, 학교에서 온 선생님이 내미는 서류에 서명을 한다. 처음 일을 시작하는 소희에게는 모든 게 낯설기만 한데, 어른들은 이렇게 하라고만 하지 누구 하나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계약서에서는 어떤 부분을 제대로 살펴봐야 하는지, 지금 자신이 서명하는 서류에는 어떤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선생님은 자신이 어렵게 따온 일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소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콜센터에서 일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매일 소희에게 일정하게 할당된 양의 일이 있으며, 그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퇴근하지 못하고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해야 하고,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는 고객이 해지하지 못하도록 다른 상품을 권유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해지를 지연시키다가 욕을 먹는 것이 소희의 주된 업무라는 것을 선생님은 알지 못한다. 소희는 고객이 고객이라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웃으면서 친절하게 답변해야만 한다. 그게 소희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고객이 컴플레인을 걸면, 그것은 고스란히 대기업에게 전달되고 그걸 받은 대기업에서는 하청업체에게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고 소리치면서 “다른 곳에 일을 주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면 그 고객을 담당했던 콜센터 직원에게 담당하는 팀장의 온갖 욕설과 함께 윽박이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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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만 잘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보다 더 잘해야 한다. 해지를 못하게(해지 방어) 하면 할수록 실적이 높아지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콜을 최대한 해지 방어해야 한다. 실적이 높아지면 옆자리에 앉은 동료들은 “소희는 이렇게 하는데, 너희들은 왜 그것밖에 못 하니?”라고 비교를 당하면서 실적에 대한 압박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렇게 매주, 한 사무실에 앉아 동고동락하는 동료들은 1등부터 꼴등까지 실적으로 줄 세움을 당한다. 소희가 포함되어 있는 지점과 다른 지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희를 이곳에 보낸 선생님도 얼마나 많은 학생을 실습 보냈는지에 따라서 평가를 받으며, 선생님이 포함되어 있는 학교도 취업률로 다른 학교와 경쟁을 해야 하고(전공과 관계없이 취업을 많이 시키기만 하면 된다. 어떤 회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학교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기관인 교육청도 실제로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취업을 나가게 되는지, 어떤 환경 속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보다는 숫자로 평가할 수 있는 취업률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교육청마저도 다른 교육청과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평가를 매기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모두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쟁은 끝이 없다. 계속된다. 내가 어제와 똑같이 오늘의 내 할 일을 해냈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보다 더 많이 해냈다면 1등이었던 어제의 나는 오늘은 2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내가 잘못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줄을 세우는 세계에서는 누군가가 1등을 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2등이 되고, 3등이 되고, 4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1등이 될 수는 없는 세계이다. 어제는 1등이었다는 이유로 박수를 받았다면, 오늘은 2등이 되었다는 이유로 야유를 받게 되는 그런 이상한 시스템 안에 모두가 갇혀있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경쟁 속에. 그 속에서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일보다 중요한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는 일도 빈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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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이 스타벅스가 매달 신메뉴를 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계속 1등을 하기 위해서 경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달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언제까지 계속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수년간 카페에서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신메뉴가 나오면 작업장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다. 새로운 메뉴를 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메뉴 개발을 위한 재료를 사들여야 하고,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해 수십 잔의 음료를 만들어 봐야 하며, 그렇게 만든 음료는 모두 한두 모금만 맛을 보고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그렇게 신메뉴를 개발한다고 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다. 신메뉴를 홍보하기 위한 팸플렛을 만들어야 하며, 메뉴판을 새로 리뉴얼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메뉴가 잘 팔려서 운이 좋으면 고정 메뉴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메뉴는 잠깐 팔리다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그 메뉴를 만들 때 사용했던 재료와 홍보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종이들은 더 이상 쓰임새가 없어진다. 유통기한이 다가오고 있고, 자리만 차지하기 때문에 버려질 확률이 높다. 새로운 메뉴를 낸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내가 미처 기억해 내지 못한 다른 게 더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스타벅스 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작년에 일했던 편의점에서는 매달 행사가 바뀔 때마다 수십 장의 행사지가 날아오고는 했다. 그 안에는 우리 매장에서 판매하는 물품도 있고, 아닌 물품도 있었는데, 편의상의 이유로 판매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행사의 종이가 배송되었다. 3/4이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다. 매달 상품 앞에 새로운 카드가 꽂히기 위해 기존에 꽂혀 있던 카드는 버려져야만 했다. 지난 달 2+1 행사를 하던 상품이 이번 달에도 똑같이 2+1 행사를 하고 있어도, 지난 달 행사카드는 이번 달 행사카드와 다른 색상에 날짜가 다르게 적혀 있기 때문에 버려야 했다. 이런 일들이 매달 전국의 모든 편의점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새로워져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여지는 새로움 뒤에는 쓰레기들이 있다. 이것이 이 세대의 프로페셔널함이다. 더 잘, 더 새롭게 해내기 위해서, 업계 1등이 되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버리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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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다음 소희>의 이야기가, 스타벅스와 편의점의 이야기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가 무관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일상에서 이 이야기들을 마주한다. 소희는 오늘 나와 통화한 카드사 직원이고, 소희의 친구는 우리 집 앞에 택배를 배달해 준 택배기사이며, 내가 다니는 병원은 또 다른 소희의 친구가 지은 건물에 위치해있다. 내가 자주 가는 편의점은 1일이 되면 쓰레기를 만들어 낼 것이고, 내가 가끔 먹는 스타벅스는 내가 마시지도 않는 새 메뉴를 내놓느라 음료를 하수구에 흘려버릴 것이다. 더 많은 물건을 배달하려고 끼니를 거르고, 쉬지 않으며 일하다가 과로사한 청년도, 실적 압박감에 견디지 못해 자살한 청년도,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경쟁에 관한 이야기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경쟁을 그만두면 뒤처질 것 같고, 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경쟁을 그만두면, 살아진다.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나가기 위한 이야기이다. 사라지지 않고, 망하지 않고.

채소의 계절 저자 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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